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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 전, 독일 본까지 찾아갔으나, 폐관 시간을 잘 못 알아 베토벤의 생가 마당만 서성이다 발길을 돌렸다. 아쉬운 맘에 그곳에서 악보를 몇 권 구입했는데, 이후 베토벤의 피아노곡을 매일같이 연주하게 되었다. 요즘 연습중인 베토벤의 <열정 Apaddionata> 소나타는, 20년 전에 치던 손 감각이 꽤 살아나 즐겁게 연습하고 있다.

걷잡을 수 없이 요동치는 감정을 표현한 이 곡을 연주하다 보면 문득 천재를 이토록 흔들어놓은 열정은 어떤 것이었는지 너무도 궁금해진다. 그는 여러번 연애를 했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18살 연하의 테레제라는 여성에게 청혼했던 사실이 유명한데, <열정>소나타는 테레제와 관계가 있는 곡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이 곡이 테레제의 후견인인 브룬스빅 백작에게 바쳐졌기 때문이다. 조화롭고 서정적인 멜로디와 격정적이고 암울한 멜로디가 교차하는 <열정>소나타에 대해 "테레제와, 테레제의 누이에게 동시에 사랑을 느꼈던 베토벤의 심적 갈등을 묘사한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초보자들도 즐겨 연주하는 <엘리제를 위하여>라는 유명한 소곡도 원래는 <테레제를 위하여>였다는 해석이 유력하다. 베토벤이 워낙 악필이서, 훗날 기보하는 과정에서 테레제가 엘리제로 탈바꿈했다는 것이다. 그럴듯하다. 어쨋거나, 그의 아름답고 낭만적인 음율들은 테레제라는 여인과 연결되어 있다. 테레제가 청혼을 받아들였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다만, 베토벤은 결혼한 적이 없다. 청각 장애 때문인지 이룰 수 없는 사랑 때문인지 우울증에 시달렸다고도 한다. 당사자에게는 마음이 찢어지는 아픔이겠지만, 이토록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 수 있다면 천재에게는 이룰 수 없는 사랑을 권장할 수도 있지 않은가. 이기적인 생각도 솟는다.


얼마 전 주성치의 영화를 처음 소개해준 친구를 만나, 최근 개봉한 <쿵푸허슬>에 대한 얘기를 나누다가, 그의 소개로 처음 본 주성치 영화 <식신(食神. God of Cookery(1996)>을 다시 떠올렸다. 마침 도사마가 아니 보았다기에, 영화를 다시 보게 되었다.

나는 몇 년전부터 주성치의 팬이다. 다시 본 영화 <식신>은 팬으로서 불성실했던 나의 호감과 지지를 생생히 되살려주었다.

주성치의 영화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영화 속의 현실과 영화 밖의 현실, 배우의 유머와 관객의 유머를 뒤섞는다. 쿨걸의 대명사인 막문위를 의리로 똘똘 뭉친 추녀로 변신시키거나, 조폭에게 발각되느냐 마느냐의 아슬아슬한 순간에 엑스트라의 NG신을 삽입하는 장난 정도 쯤이야. 주성치는 영화 속 주인공 <식신> (그의 영화 속 이름도 '주성치')의 대사처럼 "너는 내가 무슨 일을 할 지 알수 없을껄!!!"이라 놀리고 있는 듯하다.

62년생인 주성치가 40줄에 들어서니 무디어진 것 같기는 하다. <소림축구>, <쿵푸허슬> 등의 그의 최근작을 보면, 쫓아갈 수 없을 것만 같던 감각의 폭이 줄어 나같은 범인의 상상력 조준 지대까지 내려온 듯하다. 확실히, 3류 영화 같던 답답한 세트와 조잡한 효과는 세련되어졌지만, 하이퍼 유머의 현실감은 떨어졌다는 느낌이다.

그러고 보니, 그의 인생도 더 복잡해졌다. 영화를 찍을 때 마다 여배우와 일으키는 스캔들은 여전하고, 그 때마다 파파라치들과 티격태격. 이쪽저쪽 치받고 다닌 덕에 한때 "주성치 군단"으로 불리웠던 영화인들과의 인간관계도 한결 나빠졌다고 한다. 그의 상상력과 자유로움이 침해받았다 해도 이상할 것은 없을 것이다. 주성치 영화는 강한 본인의 이미지로 대변되는 표현물이다. 그러다 보니, 주성치의 팬이자 주성치 영화의 팬으로서의 본분에 다시 충실해진 나는, 밤늦도록 그의 삶을 궁금해하며 이리저리 스토킹 수완을 궁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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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V.고골리 초상, 몰레르 그림. 모스크바 트레티야코프미술관 소장"

도스토예프스키가 유명하기는 하지만, 그의 소설을 꼼꼼하게 원작 그대로 (축약본이 아니라는 뜻. 나도 러시아어를 할 줄 모른다), 읽은 사람은 만나기 어렵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은 분량도 길 뿐 아니라, <의식의 흐름>이라 할 것은 아니지만 매우 치밀한 심리 묘사가 이어지기 때문에, 그 호흡을 따라 읽기가 까다로운 편이다. 더구나 그의 소설의 핵심은 스토리 전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심리 묘사 부분에 있다. 즉, 스토리 중심으로 묘사된 축약본을 읽고 도스토예프스키를 알았다고 말하는 것은, 냄새만 맡고 음식맛을 안다고 뻐기는 셈이다.

그에 비하면, 체호프나 고골리는 중단편 위주이어서, 부담없이 권할 수 있는 작가들이다. 읽기 쉬운 문장이고, 내용도 재미있다. 고골리는 풍자소설의 대가이다. 그의 이야기풍은 아주 남달라서, 기묘한 판타지와 플롯을 섞어 강렬하고 독특한 메시지를 만들어낸다. 고골리의 잘 알려지지 않은 소설 중의 하나인 狂人일기에는 나만의 에피소드가 있다.

나는 비교적 어린 시기에 책에 빠졌는데, 민학교 5학년 때 고골리의 풍자 소설을 읽게 된다. 광인일기는 미친놈이 話者인 일기체 소설이다. 한 남자가 상류층 여인네를 사모하다가 미쳐가는 얘기인데, 책을 매우 진지하게 읽었고 강한 인상을 받았다. 한 여인을 사모하던 이 남정네에게 감정이입이 되어 가던 나는, 소설 결말을 몇 장 앞두고 <아! 주인공이 미쳤군> 깨달음을 얻었다. 이 소설의 묘미는 미친놈이 미친놈인 줄을 깨닫지 못하면서 이야기를 따라가게 만든 몰입에 있었던 것이다.

그 뒤 대학생이 되어 나는 광인일기를 다시 읽게 된다. 나는 그 기묘한 몰입과 반전을 다시 한번 느끼고 싶었다. 그러나 허사였다. 그리 길지도 않은 소설이지만, 초입 두 장을 읽은 뒤, <아니, 주인공이 미친 놈이잖어!>라는 깨달음에 도달해버렸던 것이다. 줄거리를 기억해서가 아니라, 단지 초입 두 장에서 주인공이 보여준 언행만으로, 나의 논리는 그 주인공을 비정상의 부류로 분류해 버렸던 것이다.

씁쓸했다. 나의 머릿속은 어느새 그 정도로 "정상화" 되어 버렸단 말인가. 광인일기를 초독했을 때의 나의 머릿속은 백분율상 어느 정도 사회인, 어느 정도 광인(또는 비사회인)에 속하고 있었단 말인가.

삼십대 중반에 들어선 나는 광인일기를 다시 번 집어들 만한 시기가 되었으나 망설이고 있다. 나의 사회화도와 정상도를 시험에 들게 할 자신이 없는 것인데, 어떤 쪽으로 결과가 나와도 서글플 듯하다. 그래서 광인일기 책을 집어들지 않고, 광인일기 에피소드를 끄적이는 쪽을 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