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크놀로지와 사람] 체스와 퀴즈에서 내준 승자의 자리, 바둑이 되찾을까
http://news1.kr/articles/?25945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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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11월12일, 패전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도쿄에서 흥미진진한 대결이 벌어졌다. 도쿄 도심에 자리한 어니 파일 시어터 (현재의 다카라즈카 극장)에서 주판과 전동계산기가 계산 실력을 겨루는 이색 시합이 성사된 것이다. 미국인 병사 토머스 우드가 전동계산기를 조작하고, 일본 체신국에서 일하는 마쓰자키 기요시가 주판을 들었다. 덧셈, 뺄셈, 곱셈, 나눗셈의 사칙연산을 기본으로 계산 속도와 정확도를 겨루는 시합이었는데, 4대1로 주판이 전동계산기에 승리를 거두었다. 당시 이를 보도한 영자 신문은 "문명이 갈 길이 멀다"며 한탄했고, 패배한 우드측은 "계산 능력이 아니라 전동계산기와 주판을 조작하는 신체 동작의 스피드가 승패를 갈랐다"며 분개했다.

컴퓨터는 '생각하는 기계'이다. 여타 기계 장치가 인간의 신체 작업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반면, 컴퓨터는 인간의 지적 작업을 돕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전동 계산기야말로 컴퓨터의 원시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1946년의 주판과 전동계산기의 계산 시합은 인간과 기계가 지적 능력을 겨룬 최초의 대결로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수십 년 뒤에 성사된 인간과 컴퓨터의 대결 종목은 체스였다. 1996년 IBM이 개발한 컴퓨터 '딥 블루'와 체스 챔피언 게리 카스파로프가 맞붙었다. 첫번째 매치는 4승2무1패로 인간의 승리였다. 1997년에 성사된 두번째 매치에는, 업그레이드에 매진한 '딥 블루'가 2승3무1패로 승리를 거뒀다. 수십 년 만에 승패가 역전된 것이다.

2011년에는 미국의 퀴즈 프로그램 '제오파디'에 IBM의 인공 지능 컴퓨터 '왓슨'이 출연자로 등장했다. '왓슨'은 자연 언어를 분석해서 질문에 대답을 찾아내는 인공 지능으로, 인터넷 접속을 끊은 채 퀴즈 프로그램에 임해, 프로그램 상금 순위 1,2위였던 상대를 제치고 1백만 달러의 우승 상금을 거머쥐었다. 당시 '왓슨'과 상대했던 켄 제닝스는 '감정적으로 동요하지 않는 냉정함을 갖춘 상대에 이기는 것은 쉽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곧 이세돌 프로 바둑 기사와 컴퓨터 알파고의 한판 대결이 벌어진다고 한다. 수십 년간의 인간과 컴퓨터의 대결에서, 컴퓨터의 승률이 점차 높아지고 있는 만큼, 대전 상금 1백만 달러의 행방을 둘러싸고 의견이 분분하다. 체스와 퀴즈 프로그램에서는 인간이 컴퓨터에 내어준 승자의 자리를 바둑에서 되찾을 수 있을 것인가. 어떤 결과가 되든 인간의 지적 능력에 도전장을 내어온 컴퓨터의 역사에 기록될 만한 사건이라는 점은 틀림없다.


[테크놀로지와 사람] “하루에 몇 장이나 사진을 찍나요?”:사진찍기의 일상화를 생각하다
http://news1.kr/articles/?2573234
80년대 생활상을 그려 인기를 끌었던 복고 드라마를 보면 주인공이 수학 여행을 가며 아빠에게 카메라를 빌려가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그러고 보니 그 때 그 시절, 사진 찍기는 특별한 경우에만 연출되는 비일상적인 의례였다. 수학 여행이나 봄소풍과 같은 특별한 외출이 아니면, 장롱 속에 소중히 보관된 가족용 카메라를 갖고 나가도 된다는 허락은 떨어지지 않았다. ‘1인 1카메라’가 일반화한 지금과는 판이한 모습이다.

휴대폰 시대에 가장 달라진 것이 무엇이냐 한다면, 필자는 사진 찍기의 일상화를 꼽겠다. 얼마 전 세미나에서 들은 핀란드의 평범한 10대 소녀의 사례는, 휴대폰을 이용한 사진 찍기가 전세계 젊은이의 삶에 얼마나 깊이 파고 들었는지를 보여준다. 한적한 시골 마을에 사는 15세 사뚜는, 6개월 동안 ‘스냅챗’(사진과 영상을 주고받는 채팅앱으로 특히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많다) 으로 53,854개의 사진 혹은 영상 메시지를 보냈다. 음식이나 풍경, 자신을 찍은 사진을 친한 친구나 가족들에게 보냈는데, 환산하자면 매일 257번 자신의 일상을 이미지로 갈무리한 셈이 된다. 필자가 인터뷰한 한국과 일본의 젊은이들 중에도 휴대폰에 저장된 사진이 1만개를 훌쩍 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휴대폰으로 일상을 기록하고 저장하며, 채팅앱이나 SNS를 통해 공유한다. 오늘날 사진찍기는 걷기나 말하기와 다름없는 일상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처음 카메라폰이 나왔을 때, “휴대폰에 굳이 카메라를 달 필요가 있느냐” 는 반응이 의외로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실은 카메라폰을 처음 개발한 제조사조차 휴대폰 카메라가 널리 쓰일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세계 최초의 카메라폰은 1999년 일본 쿄세라에서 내놓은 VP-210라는 기종으로, 11만 화소의 렌즈와 카메라 기능을 탑재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기능은 사진찍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영상 통화를 위한 것이었다. 때문에VP-210의 렌즈는 사진찍기에 적합하도록 바깥을 향한 게 아니라, 휴대폰 주인의 얼굴을 찍기 쉽도록 안쪽을 향해 달려 있었다. 그런데 소비자들의 반응은 예상을 뒤엎었다. 영상 통화 기능은 그닥 인기를 끌지 못한 반면, 많은 사람들이 평범한 사진을 찍기 위해 휴대폰 카메라를 사용한 것이다. 이후 전면을 향한 렌즈가 탑재된 (혹은 렌즈의 방향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카메라가 주류가 되었다.

수십년 뒤 드라마 “응답하라, 2016년”이 만들어 진다면 지금의 사진찍기는 어떻게 그려질까.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고 일일이 이미지를 공유하는 것 역시 아스라한 추억이 되어 있을지 모른다. 분명한 것은 ‘사진찍기’를 빼고는 2016년 우리의 일상을 생생하게 그려내기란 거의 불가능하리라는 점이다.


[테크놀로지와 사람] 소셜 미디어는 ‘사회악’이 아니다
http://news1.kr/articles/?2540426
유럽연합 (EU) 이 최근 16세 미만 청소년의 온라인 사이트 이용에 대해 보호자 동의를 의무화하는 내용을 담은 새 온라인 정보보호법을 가결했다. 지금까지 보호자 동의가 필요한 연령은13세였는데, 이를 우리나라 기준 중학생으로 올린 것이다. 유럽의 청소년들은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 소셜미디어를 자기 결정으로 이용할 수 없게 되었다. 온라인 개인 정보 유출 문제가 심각하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청소년들의 소셜 미디어 이용을 막는 것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리가 없다는 것은 불보듯 뻔하다.

반면교사로 삼을 만한 사례가 있다. 휴대폰 인터넷이 일찌감치 이용되었던 일본에서는, 휴대폰으로부터 청소년을 ‘보호’하는 방안을 실시 중인 지자체가 있다. 이시카와현은 2010년부터 중학생 이하 청소년이 휴대폰을 갖지 못하도록 학부모와 교사에 의무를 지우는 조례를 실시중이다. 도입 당시부터 찬반 의견이 대립했는데, 인터넷 게시판에서의 집단 따돌림 등 청소년 문제가 심각한 상황에서 찬성파가 힘을 얻었다.

결과는 어떨까. 이시카와현 중학생의 휴대폰 소지율은 일본의 다른 지역의 절반 이하로 매우 낮다. 하지만, 인터넷과 관련한 청소년 문제가 줄어들지는 않았다. 중학교 때 공개적으로 휴대폰을 이용하지 못했으니, 고등학교 이후 휴대폰에 더욱 몰두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니 오히려 문제다. 또, 청소년에게 휴대폰을 사주는 행위가 위법이니, ‘휴대폰을 사 주고 이를 학교에 비밀로 하라고 아이들에게 당부해야 하는 상황’에 곤혹스러움을 표하는 학부모도 있다고 한다.

인터넷 유해 논란이 어제 오늘 일이 아니기는 하지만, 청소년의 이용을 허락하네 막네 하는 케케묵은 논쟁을 언제까지 계속해야 하나 답답하다. 돈 잘버는 ‘대박’ 기업이 배출되었다고 해서 소셜미디어나 인터넷을 새로운 창조와 혁신의 근원인 것처럼 떠받드는 것도 말도 안 되지만, 청소년에게 해악을 끼치는 ‘사회악’인 양 금기시하는 것도 우매한 일이다. 소셜 미디어나 인터넷은 테크놀로지일 뿐이다. 이 테크놀로지를 평생 멀리할 생각이 아니라면, 나이가 들 때까지 못 쓰게 하기 보다는 어릴 때부터 잘 쓸 수 있는 방법을 익히는 것이 훨씬 더 현명하다.


[테크놀로지와 사람] 책도 '뉴 미디어'였던 시절이 있었다
http://news1.kr/articles/?2515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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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대중적인 출판 산업이 등장하던 시기, 책은 일종의 ‘뉴 미디어’였다. 당대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책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책은 ‘경박한 생각을 마구잡이로 세상에 쏟아내는 방법’에 불과하며, 책읽기는 ‘스스로의 사고를 포기하고 남의 생각을 답습하는 것’이므로 인간의 독창적 사고를 망가뜨린다고 비판했다.

쇼펜하우어의 책에 대한 폄하는 저자에 대한 불신에서 기인했다. 출판 산업이 ‘독창적 사고가 없으면서 타인의 얕은 생각을 베끼는 저자’를 양산하고, ‘익명으로 말도 안 되는 비판을 쏟아놓는 비평가’에게 활동의 장을 제공함으로써 질낮은 지식을 사회에 퍼뜨린다는 것이었다. ‘책’이라는 단어를 지우고 듣자면, 지금의 인터넷에 대한 비판을 그대로 옮긴 듯하다.

실제로 당시에 저질책이 많이 만들어져 사회에 악영향을 끼쳤느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심도있고 다양한 생각들이 책을 통해 빛을 보던 시대였다. 예를 들어, 쇼펜하우어가 비난했던 대표적인 저질 저자가 그 유명한 철학자 헤겔이다. 헤겔은 인기를 누리는 스타 저자였는데, 쇼펜하우어는 헤겔이 오로지 대중에게 어필하기 위해 책을 쓰는 거짓말쟁이 라고 비난했다. 자신의 책보다 헤겔의 책을 사랑하는 대중에 대한 분노와 절망이 은밀히 표출된 것일지도 모른다. 철학자들의 속사정이야 어떻든, 쇼펜하우어에게 책은 진정한 철학과 독창적 생각을 파괴하는 주범이었다.

철학자 테오도르 아도르노의 라디오에 대한 반감은 쇼펜하우어의 책 혐오와 일맥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20세기 중반, 아도르노는 재즈와 같은 대중 음악이 음악의 독창성을 훼손하고 야만적으로 변질시킬 뿐 아니라, 듣는 사람들의 영혼을 침식한다고 탄식했다. 그에게 있어 천박하고 불건전한 재즈를 줄창 틀어대는 라디오는, 썩어빠진 자본주의와 천박한 대중 문화의 표상이자 배격해야 하는 대상이었다.

미국의 유명 지식인, 월터 리프먼은 죽을 때까지 TV를 불신했다. 그는 신문에 명칼럼을 써 유명세를 얻고 퓰리처상을 받은 저널리스트였는데, ‘활자=신뢰 가능, 영상=신뢰 불가능’이란 사고의 공식을 갖고 있었던 듯, 방송국의 인터뷰 요청은 늘 딱 잘라 거절했다. 70년대 중반 세상을 뜰 때까지 TV인터뷰에 응한 것은 단 한번 뿐이다.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의 ‘뉴 미디어’ 혐오에는, 새로이 부상하는 표현자 그룹에 대한 적대감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PC 통신 시대에는 게시판 논객, 인터넷 보급기에는 블로거들이 부정적 편견을 감내했고, 요즘은 그 전선이 소셜 미디어로 옮겨갔다. 혐오와 편견을 견디는 것은 ‘뉴 미디어’의 숙명이다. 한편 책, 신문, 라디오, TV 등의 ‘올드 미디어’는 부정적 편견에서는 벗어났을 지는 몰라도, 진부함을 탈피해 변화하지 않으면 사라질 지 모른다는 위기 의식에 시달리고 있다. 이래도 고달프고 저래도 고달픈 미디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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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놀로지와 사람]음성인식 로봇과 대화, 어떤 느낌?
http://news1.kr/articles/?2495899
최신 스마트폰에는 목소리로 기능을 실행시키거나 정보를 안내하는 기능이 있다. 스마트폰이 방귀 소리를 단어로 인식했다는 등의 우스갯소리가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것을 보면, 음성 로봇과의 대화를 불쾌하게 느끼는 사람은 많지 않은 듯하다. 그렇다면, 상대가 음성 로봇이라는 것을 모르는 채로 대화를 나누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뉴욕시의 한 직원이 음성 인식 로봇으로 고객 전화에 대응한 것이 발각됐다. 로널드 딜런은 40년 경력의 베테랑 개발자인데, IT관련 헬프 데스크 업무에 음성 인식 로봇을 대타로 부려 먹은 혐의로 20일간의 정직 처분이 확정됐다. 딜런은 출신지 악센트가 강한 말투가 신경 쓰여서 일부러 천천히 말했을 뿐이라며 의혹을 부인했지만,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음성 로봇이 대응한 것으로 보이는 딜런의 안내 통화]

통화를 녹음한 파일을 들어보면, 첫 부분에 "You have reached the Help Desk. This is Mr. Dillon. How may I help you?"(헬프데스크와 연결되었습니다. 딜런이 안내합니다. 어떻게 도와드릴까요?)라는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말투가 느리고 딱딱해서, 뒷부분의 자연스러운 흐름과 대조적이다. 바로 이 어색한 초반부가 로봇 대타 의혹이 제기된 부분인데, 어떤 지는 독자들이 직접 판단하기 바란다.

2013년에는 타임지 기자가, 의료 보험 상품의 텔레마케터와의 대화를 녹음해서 통화 상대가 음성 인식 로봇이라는 의혹을 제기한 적도 있다. 기자가 로봇이냐고 질문하자, 텔레마케터는 "I am a real person"(저는 실제 사람입니다) 라고 답변한다. 이에 기자가 "I’m not a robot"(저는 로봇이 아닙니다)라는 문장을 말해 주기를 부탁하지만, 전화 너머의 목소리는 "전 실제 사람입니다"라는 문장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로봇으로 추정되는 텔레마케터와 마이클 쉐러 타임지 기자의 통화]

기사가 공개된 뒤, 로봇 텔레마케터 의혹이 제기되었던 온라인 보험 회사의 홈페이지는 자취를 감추었다. 실제 보험 회사가 아니었을 수도 있고, 개인 정보를 수집하기 위한 부적절한 수법이었을 지도 모른다.

자동 응답 시스템 (ARS) 이 일반화된 지금, 통화기 너머로 녹음된 목소리를 듣는 것은 익숙한 일이다. "*번을 누르라"는 음성 안내 (실제로는 음성 '명령'에 따라 소비자가 작업을 수행하는 과정)에 따르다 보면 수십 분이 훌쩍 지나기도 하고, 결국은 한참을 기다린 끝에 안내원과 직접 통화를 해서야 원하는 결과를 얻은 경우도 다반사이다. 개인적으로는 ARS 안내를 통해 만족스러운 경험을 한 기억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ARS 서비스가 꾸준히 확산되어 온 것은 이 시스템이 기업의 비용을 줄여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비자가 당혹스러움을 견디면서 시간과 노력을 지불해야 하는 결과가 된다면, 사회적 비용이 기업에서 소비자로 전가된 것에 불과하지 않느냐는 지적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이번에 소개한 에피소드는 아직 본격적인 서비스 상용화가 시작되지도 않은 로봇 음성 기술에 관한 것이지만, 그 기술이 일방적인 고객 서비스 혹은 부적절한 정보 수집 수단으로 활용될 가능성을 시사하는 듯해 석연치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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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놀로지와 사람] 두 얼굴을 가진 '잊힐 권리'
http://news1.kr/articles/?2481684
강원도의회가 '잊힐 권리'를 지원하는 조례안을 지난 10월16일 가결했다는 뉴스를 접했다. '잊힐 권리'란 인터넷 네트워크에 기록된 개인 정보 삭제를 요청할 권리를 뜻하는데, 2012년 EU집행위원회가 개인의 디지털 정보에 대한 재량권을 보호하기 위해 권리를 명문화했다. 이 권리가 인정되면 개인이 구글 등의 검색 사이트에 저장된 개인 정보를 영구 삭제하도록 요청할 수 있게 되는데, 이것이 사회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놓고 논란이 분분하다.

강원도의회에서 '잊힐 권리'에 대한 조례안이 가결될 즈음, 스페인에서 상반되는 판결이 하나 나왔다. 30여년전 마약 밀매로 실형을 선고받은 개인 두 명이 형기를 마치고 출소했다. 이들은 자신의 이름을 인터넷에서 검색할 때, 수십 년 전의 마약 사건 기사가 상위에 뜨는 것을 보고 자신들의 '잊힐 권리'를 보장해 달라는 소송을 걸었다. 마약 사건에 대한 기사를 게재한 신문사를 대상으로, 기사의 삭제를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재판의 1심, 2심은 개인의 손을 들어줬다. 신문사는 기사를 삭제해야 하고, 이들에게 금전적 보상을 해야 한다는 판단까지 내려졌다. 그런데 신문사의 상고로 계속된 재판에서 판단이 뒤바뀌었다. 스페인 최고법원은 최종적으로 “신문사는 기사를 삭제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 대신 성명, 주소 등 개인을 특정할 수 있는 정보에 색인이나 해시태그를 거는 기술적인 조치를 금지했다.

지금까지는 '잊혀진 권리'를 보호해야 한다는 쪽에 중심을 두던 EU에서 이를 뒤집는 판결이 나온 것이다. 개인의 인권, 혹은 명예를 손상하는 행위는 피해야 마땅하지만, 과거의 사건 기록을 지우는 것은 공익에 어긋난다고 본 것이다.

강원도의회의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이번에 가결된 조례안은 '잊힐 권리'와 관련된 시스템 도입을 사업자에게 권장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고 한다. '잊힐 권리'에 대한 사업화를 염두에 두고 전문 회사와 업무 협약도 맺었다고 한다. 디지털 시대에 걸맞은 일종의 비즈니스로 접근하고 있다는 인상마저 있다.

인터넷에 남은 개인의 흔적을 속속들이 찾아내 일괄 삭제해주는 '디지털 장의사'가 성업 중이라고 하니, '잊힐 권리'를 비즈니스 기회로 접근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잊힐 권리'는 두 얼굴을 가진 가치이다. 네트워크에 산재하는 정보에 대한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고 프라이버시를 보호한다는 의미에서는 바람직하지만, 많은 사람의 행복과 안위를 위해서는 '알 권리'가 더 중요하다는 주장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잊힐 권리'와 관련해서 판결이 내려졌거나 진행 중인 소송의 대다수가, 범죄 이력이나 탈세 정보 등 개인의 위법 행위에 대한 데이터 삭제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잊힐 권리'에 대해 반대하는 측에서는 개인 정보를 보호한다는 명분 하에, 정치인 등 사회적 책임이 큰 인사들이 과거 이력을 세탁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을지 우려하고 있다. 비즈니스를 고민하기 이전에 우선 '잊힐 권리'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 데에 힘쓰는 것이 바람직하다.


[테크놀로지와 사람] 진화하는 '디지털 네이티브'
http://news1.kr/articles/?2461443
10여 년 전 '디지털 네이티브'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디지털 미디어에서 따온 '디지털'에 원어민을 뜻하는 '네이티브'를 붙여 만든 신조어로, 태어날 때부터 PC, 게임, 인터넷 등이 존재했고 일상적으로 사용해 온 젊은 세대를 뜻한다. 교육학자 마크 프렌스키에 따르면, '디지털 네이티브'는 정보 수집이 빠르고, 멀티태스킹이 능숙하며, 네트워크에 접속 중일 때에 일을 더 잘해낸다. 문자보다 이미지 정보를 좋아하며, 미지의 정보 탐색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이런 특징들이 젊은이의 전유물로 여겨졌다.

일본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네오 디지털 네이티브'라는 말이 있다. 태어날 때부터 디지털 미디어가 있었다는 의미에서는 '디지털 네이티브'이지만, 휴대폰과 무선 네트워크 환경에 익숙한, 80년대 후반 이후 태어난 젊은 세대를 뜻한다. 정보학자 하시모토 요시아키와 광고대행사 덴쯔가 공동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네오 디지털 네이티브'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진다.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기보다 메신저나 이메일 등으로 의사소통하는 게 편하다 ▲휴대폰으로 쓰고 PC에서 읽는 게 익숙하다 (휴대폰으로 쓴 내용을 PC에서 확인한다) ▲휴대폰 스크린이 작다기보다는 PC모니터가 크다고 느낀다 ▲휴대폰을 장시간 이용하는 장소는 (무선 네트워크의 장점을 활용할 수 있는 외부가 아니라) 자신의 방이다 등등.

조사 결과는 지금 우리나라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특히 대면 소통보다 메신저를 편하게 느끼거나, 휴대폰 글쓰기에 익숙한 점, 휴대폰을 자신의 방에서 장시간 이용하는 특징 등은 스마트폰을 많이 쓰는 이들에게 와 닿을 것 같다. 일본에서는 스마트폰이 대중화되기 전부터 이런 사용 패턴이 일반적이었는데, 이는 독특하게도 일본에서는 PC보다도 먼저 모바일 인터넷이 보급됐기 때문이다.

더욱 인상적인 것은, 인터넷에 대한 인식의 변화이다. '디지털 네이티브'는 인터넷을 '미지의 세계와의 연결 고리'라고 생각한다. 이 때문에 하이퍼링크처럼 불확실한 정보원을 클릭하는 데에 거부감이 적으며, 인터넷을 통한 만남, 정보 탐색을 즐긴다. '호기심' '개방성' '적극적 참여'야말로 이전 세대와 이들을 구분하는 키워드였다. 그런데 '네오 디지털 네이티브'는 달랐다. 이들은 인터넷을 '나와 가깝고 잘 아는 이들이 상주하는 세계'라고 간주한다. 외톨이가 되지 않기 위해 늘 그 세계에 접속할 필요가 있지만,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평가받는다는 사실에 스트레스를 느낀다. 이런 마음가짐을 설명하는 키워드는 '가까움' '친근함' 혹은 '사생활 침해에 대한 불안'이다.

인터넷이 탄생한 지 수십 년이 지났고, 미디어도 다양해진 만큼, 인식과 태도가 변하는 것은 당연하다. 개인차가 큰 행동 패턴을 근거로 굳이 '세대론'을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문제는 변화의 큰 흐름이 어느 쪽으로 가고 있느냐는 것이다. '네오 디지털 네이티브'에 대한 조사는, 개인에게 있어 인터넷이 의미를 갖는 중심축이, 사회적, 공적 네트워크에서 개인적, 사적 네트워크로 옮겨가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사회적, 공적 도구로서 인터넷의 중요성이 줄었다기보다는, 개인적 행복을 인터넷에 위임하는 경향이 커지고 있다는 뜻이다.

돌이켜 보자면, 온라인에서 제기되는 많은 사회적 논란과 이슈가, 인터넷의 사회적, 공적 도구로서의 위상과 개인적, 사적 네트워크로서의 존재 방식의 온도 차에서 비롯되었다. 사적, 개인적 도구로서 인터넷의 역할과 의미가 커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변화라면, 인터넷의 사회적, 공적 책임만을 강조하는 규제 일변도의 접근법은 시대착오적이다. 그보다는 개인과 행복의 도구로서의 인터넷의 역할을 인정하고, 아직은 모호한 ‘공’과 ‘사’의 문화적 경계선을 명확히 하기 위한 자율적 해결법을 찾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테크놀로지와 사람] 화성과 과학 기술의 상상력에 대해
http://news1.kr/articles/?2449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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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은 오래도록 인간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존재였다. 근대 이후, 화성과 외계 생명체에 대한 관심은 지속적으로 커졌다. 과학 기술의 발달로 천문학 분야에서 눈부신 진보가 있었던 것에 힘입은 바가 크지만, 한편으로는 미디어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외계 생명체와의 교신 가능성에 대한 기대감이 커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역사적으로 화성과 특히 인연이 깊은 미디어라면 무선 통신과 라디오를 들 수 있다.

천문학자이자 공상 과학 소설 작가였던 까미유 플라마리옹은 1890년 한 잡지에 투고한 논문에서 무선 통신을 이용해 외계와의 소통을 제안하며 이 아이디어가 "전화, 축음기, 화상 통화, 영화만큼 황당무계한 것도 아니지 않느냐"고 말했다. 프랑스 천문학회의 초대 회장이었던 그는 외계인의 존재를 굳게 믿었는데, 특히 무선 미디어야말로 우주의 비밀을 밝혀줄 열쇠라고 생각했다. "우주에 대한 탐구는 이제 시작했을 뿐이다" 라는 그의 말은 무선 통신 장치의 발명에 여념이 없던 기술광들에게 큰 자극이 되었다.

에디슨의 라이벌이었던 발명가 니콜라 테슬라는, 1899년 실험용 전류 수신탑에 수상쩍은 무선 신호가 잡혔다고 보고한 적이 있다. 심령주의에 푹 빠져있던 당시의 지식인답게 그는 신호가 화성에서 온 메시지라고 추측했다. 몇 년 뒤 무선 통신 장치를 세상에 내놓은 라디오의 아버지, 마르코니도 전파를 이용한 외계와의 교신 가능성을 언급, 과학자들의 상상력을 부추겼다.

20세기 초반, 탐험가였던 퍼시벌 로웰이 화성에 대한 책을 내놓으며 사회적 관심은 더욱 구체화했다. 중세의 천문학 지식과 스스로의 관측 자료를 집대성한 그의 책은, 지구인보다 지능이 높고 수준 높은 문명을 구축한 화성인에 대해 조리 있게 추론했다. 상체가 발달하고 머리가 크며 두 발로 걷는 화성인의 이미지는 이때부터 생겼다.

라디오 방송도, 트랜지스터라디오도 없던 시절, 무선 통신은 외계인과 교신을 간절히 원하던 젊은이들의 장난감이었다. 젊은이들은 통신 장치를 조립해서 만들고, 이 장치를 이용해 멀리 있는 상대와의 교신을 경쟁하는 DX ('Distant' 장거리, 먼 거리를 의미하는 은어) 취미에 몰두했다. 이 취미가 주는 재미의 종착점은, 화성인과의 교신 가능성이었다.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세티'(SETI, Search for Extraterrestrial Intelligence) 프로젝트는 전파 망원경으로 외계인과 접촉한다는 가설에 근거하고 있으니, 무선 통신을 통한 외계와의 교신 시도는 현재 진행형이다.

화성과 라디오의 '악연'은 이후에도 이어졌다. 1938년 미국 CBS라디오는 핼러윈 특집으로 화성인의 지구 침략을 다룬 공상 과학 소설 '우주 전쟁' (H.G웰즈, 1898년)을 극화한 라디오 드라마를 방영했다. TV가 대중화하기 전 라디오의 영향력을 증명하듯, 많은 청취자가 화성인의 뉴저지 침공 사실을 믿고 패닉에 빠지는 소동이 벌어졌다. 소동 직후 이 해프닝에 대해 조사한 심리학자 캔트릴은 "전쟁 발발에 대한 위기감 때문에, 화성 침공도 현실감있게 느껴졌다"는 청취자의 목소리를 전달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황당무계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당시 사회의 분위기에서는 리얼리티가 있었던 것이다.

얼마 전 미국항공우주국(NASA)이 화성에 액체 상태의 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표하면서, 화성에 대한 기대감이 다시 한 번 고조되고 있다. 지구인의 탐사 계획이 화성의 생태계를 오염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도 나오고, 화성에 '정착촌'을 만든다는 구상도 주목을 받는 모양이다. 화성 플랜이 실현되는 것은 짧아야 십수 년, 길면 수십 년 이후의 일이 될 터이다. 계획들이 원안대로 실현될 지 여부도 미지수이지만, '화성에 물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전 세계가 떠들썩했던 2015년이 수십 년 뒤의 후대에게 어떻게 비추어질 지도 궁금하다. 실체는 베일에 싸여있을 지언정, 상상력과 호기심의 근원으로서 인류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쳐온 화성이란 존재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http://news1.kr/articles/?2432711
[테크놀로지와 사람]'로봇 폭행사건'서 미래사회를 생각한다
'사람닮은 로봇'…섬뜩한가요, 아니면 귀여운가요?
얼마 전 일본에서 인간과 흡사한 모습의 로봇이 폭행을 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사건은 지난 6일, 카나가와현 요코스카시에 있는 소프트뱅크 매장에서 일어났다. 술에 취한 60대 남성이 매장 직원의 태도가 맘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접객 업무를 위해 배치된 로봇 ‘페퍼 (Pepper)’에 발길질을 했다. ‘페퍼’는 쓰러진 뒤, 외부 자극에 대한 반응이 느려지는 등 일시적으로 문제를 겪었지만, 지금은 정상 업무에 복귀했다. 이 사건은 여러 매체에서 로봇 폭행으로 소개되었지만, 정작 용의자는 기물손괴죄로 체포되었다. 로봇은 인간이 아니므로, 폭행죄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 사건이 화제가 된 것은, 폭행을 당한 대상이 로봇이라는 점 때문이다. 인간과 로봇이 함께 하는 미래는 SF영화의 단골 주제 아닌가. 이 ‘로봇 폭행 사건’을 인간과 로봇이 갈등하는 미래의 예고편 정도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일본의 로봇 공학자 모리 마사히로(森政弘)는 로봇에 대한 인간의 정서적 반응을 연구했는데, 결과가 흥미롭다. 인형이 귀엽다고 느끼듯, 우리는 인간을 닮은 로봇에 대해 정서적 친밀감을 느낀다. 그런데 로봇이 인간을 닮은 정도가 어느 선을 넘어서면, 친밀감이 아니라 섬뜩함을 느낀다. 인간과 닮았지만 똑같지는 않기 때문에 생기는 부자연스러움과 거북함이 불쾌한 느낌을 만들어낸다. 이 선을 넘어 인간을 닮은 정도가 늘어나면 로봇에 대한 친밀감은 다시 회복된다. 그래프로 그려보면, 로봇의 인간 유사성에 비례해서 높아지던 친밀도가 어느 지점에서 뚝 떨어졌다가 다시 회복되는 모양이 마치 계곡처럼 나타난다. 모리는 이 그래프를 ‘섬뜩한 골짜기(uncanny valley, 不気味の谷: 언캐니 밸리, 불쾌한 골짜기로도 불림)’ 라고 이름 붙였다.

‘섬뜩한 골짜기’에 관한 논의는, 인간이 로봇에 대해 정서적으로 반응한다는, 어찌 보면 당연한 사실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지금까지 로봇에 대한 판단과 평가는 기능적, 기술적 부분에 집중되어 왔다. 그런데 로봇의 정서적, 감정적 역할에 대해서 생각해야 하는 때가 된 것은 아닐까. 적어도 취객이 로봇 ‘페퍼’에게 화풀이 폭력을 가한 사건은, 로봇에 대한 인간의 부정적 감정이 표출된 사례인 것이다.

지난 6월 정식 판매가 시작된 ‘페퍼’는 독자적인 감정 알고리즘을 탑재한 가정용 로봇이다. 두 발로 걷고 공을 차는 ‘아시모’ (90년대 혼다사가 발매한 로봇) 에 비해, 바퀴로 이동하는 ‘페퍼’는 문지방도 못 넘는다. 하지만 ‘페퍼’는 주변 환경에 의해 감정이 변화하며, 상대방의 기분에 맞춰 정서적으로 반응한다. 감정과 지능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는, 상용화된 로봇 중 가장 진보되었고 또 인간과 비슷하다.

그보다도 관심을 모으는 것은 그가 학습한다는 점이다. 그의 지능은 완결된 것이 아니라, 인간과의 경험과 배움을 통해 지속적으로 성장한다. 개별 로봇들의 학습 결과는 인터넷을 통해 클라우드 데이터베이스로 보내어져, ‘페퍼’의 집합적 인공 지능을 정교화한다. ‘페퍼’는 스스로 똑똑해지는 로봇이다.

인공지능 연구자 레이 커즈와일은 2045년 이전에 인간 지능을 뛰어넘는 지성이 출현하리라 단언하는데, 이는 인공 지능이 학습을 통해 스스로 똑똑해진다는 예측에 근거한 것이었다. ‘페퍼’의 본체 가격은 19만8,000엔 (한화 약 190만원) 으로 탑재된 하드웨어의 사양에 비해 파격적으로 싸다. 이 점을 두고 ‘페퍼’ 판매로 수익을 회수하기 보다는, 가능한 한 많은 ‘페퍼’를 실제 학습상황에 투입해 하루라도 빨리 우수한 인공 지능을 구축하겠다는 의지가 우선 반영된 것으로 분석한다.

로봇 폭행 사건을 기술에 대한 단순 혐오 현상으로 치부하기에는 꺼림찍한 이유가 이 지점에 있다. ‘페퍼’ 자체는 실패로 돌아갈 지 모르지만, 지능적, 정서적 로봇을 정교화 하려는 시도는 계속될 것이다. 인간과 정서적 교감을 나누고 스스로 똑똑해지는 로봇. 이 새로운 종류의 개체를 어떤 존재로서 사회에 받아들일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 답해야 하는 시점이 의외로 가까울 지 모른다.

한편으로는, 로봇이 인간의 감정과 정서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라는, 맹랑한 궁금증도 생긴다. 변덕스럽고 일관성 없는 인간의 마음이 로봇의 알고리즘 속에서 어떻게 분석되고 정보화될 것인가.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인간과 로봇과의 관계를 규정하는 중요한 지점일지도 모른다. 얼마전 취객에게 돌연 발길질을 당해 쓰러진 ‘페퍼’가 클라우드 데이터 베이스에 어떤 정보를 피드백했을 지 새삼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