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야 읽었다는 게 민망하지만) 매우 흥미롭게 읽은 '소크라테스의 변명/국가/향연'은 800여쪽의 무거운 책이다. 플라톤이 쓴 '소크라테스의 변명','국가' 10부,'향연'의 전문 번역 500여쪽에 이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생애와 사회적 배경, 사상에 대한 자세한 해설이 200 여쪽이 붙어있는 구성이다. 소크라테스의 말을 빌어 플라톤이 글로 엮은 앞부분이야 동서고금을 막론하는 명문임에 틀림없을 뿐 아니라, 뒷 부분의 해제의 수준도 상당히 높다. 그리스 철학에 대한 사상적 이해도 탁월하고 글솜씨도 유려해, 플라톤의 글에 지지 않을 정도이다. 문장도 번역문임에도 보기드불게 읽는 맛이 있다. 최근 읽으면서 멀미가 날 정도로 악문장인 번역서를 많이 접한 터라, 역자의 막힌없는 글솜씨에 감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번역서임에도, 원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누가 쓴 (혹은 이 역시 번역한) 책을 한국말로 옮겼는지 알려주는 정보가 없다. 심지어는 '역자의 말'도 없다. 번역서의 기본이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다. 역자는 왕학수이다. 짧은 역자 약력에는 일본 조치대학교에서 유학했다고적혀 있으니, 아마 일본어 번역본을 한국어로 중역했으리라. '국가' 본문 중에는 음식에 맛을 더하는 소스를 '간장'이라고 언급한 부분이 있는데, 이 역시 일본어 번역본의 '의역'을 한국어로 '직역'한 결과로 보인다. 수준높은 해제를 쓴 (아마도)일본의 학자가 누구일까. 그리스 철학에 조예가 깊은 그의 저서를 더 읽어보고 싶지만, 알 길이 없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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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빈(孫臏)
from 잡담/ Miscellaneous 2017/09/07 12:22
일반적으로 알려지기를 <손자병법>은, 춘추시대의 전략가 손무(孫武)가 쓴 병법서이다. 혹은 손무가 쓰기 시작한 병법서를 손자인 손빈(孫臏)이 완성시켰다는 일설도 있다. 80년대에 읽은 <손자병법>은 후자의 일설을 전제로 쓴 책이었는데, 책은 예전에 내 손을 떠났지만 분명치 않은 기억 속에는 굴곡이 많았던 손빈의 인생에 대한 기술이 비교적 충실했던 인상이 있다.

손빈의 원래 이름은 "孫賓"이라고 한다. 그는 뛰어난 머리와 출중한 능력 때문에 동료의 시기와 모함을 받아, 다리 무릎 아래를 잘라내는 극형을 당한다. 억울하게 앉은뱅이의 인생을 살게 된 것인데, 어찌보면 덕분에 병법서를 집필하는 큰 일을 해냈다. 다리를 잘리는 사건을 계기로 그는 이름 '賓'에다가 몸을 의미하는 육변(月=肉)을 붙인 '臏'(무릎을 뜻함)으로 개명했다고 한다. 다리 무릎 아래를 잘라내는 극형을 '빈형(臏刑)'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어쩌면 이 형벌의 이름이 손빈 때문에 붙은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다리를 잘리기 전의 이름이 우연히도 孫賓이었다는 이야기가 나중에 짜맞추어진 것일 수도 있다.

어찌 되었든, 이름을 바꾸는 것은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다리로 멀쩡히 걸을 수 있던 孫賓에서 앉은뱅이인지라 머리를 쓰며 살아가야 하는 孫臏이 된 것이니, 개명은 과거의 나와 결별하고 새롭게 태어나는 내면적 계기였을 것이다. 이름을 바꾼 것이 정말 손빈의 결단이었는지, 아니면 나중에 이야기를 짜맞춘 총명한 호사가의 재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후세에게 좋은 교훈이 될 듯해서 #적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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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탐구 1
from 잡담/ Miscellaneous 2016/01/27 12:40
동생의 꼬임에 빠져 권유에 이끌려, 본업이 하기 싫을 때 명리학 공부를 하고 있다. 별 생각없이 입문책을 집어들었다가 "명리학이 과거 시험 과목이었다"는 대목에서 문득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것이 대체 무엇이기에 국가고시 과목이었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나는 국가고시 학력고사 보고 대학교에 들어간 뒤, "음양오행론" 같은 못된 삿된 책을 집어들었었다. 중고생 시절은 동양 철학이 때아닌 붐이었던 기억이 난다. '한단고기'니 '천기누설'이니, '정도령론' 같은 혹세무민 사상 운명론도 읽었었다. 당시에는 총명했던 김용옥씨가 쓴 동양 철학 입문서도 그 즈음이었다.

명리학 공부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인간 탐구'이다. '명리학'이라 하면 고수도 많고 어마어마한 규모의 역술 시장을 무대로 하는 골치아픈 분야인 만큼 초보가 명함을 내밀 판은 아니지만, 내 방구석에서 내멋대로 '인간을 탐구하겠다'는데 누가 뭐라 할 것인가. 경험적으로 이해 가능한 인간은 세상에 '나' 하나 뿐이니, 그 '나'를 알겠다는 맘으로 명리학 공부를 시작하면 삿된 구석도 없는 것이다. 사주 명식을 통해 보는 '나'라는 인간은 아직 낯설지만, '나'라는 인간을 포함해 이 사람 저 사람 인생살이를 탐구하겠다는 순수한 관심이 샘솟는 걸보면, 다른 사람의 삶에 무관심한 내게 긍정적인 변화다.

'사주는 통계'라는 말이 있다. 많은 손님 이들과 상담을 해보고 (명리학에서는 '임상'이라는 말을 즐겨쓰더라), 추상적인 명리학 이론을 사례를 통해 구체화한 고수들의 통찰력은 통계적 지식이라 해도 무방할 지 모르지만, 기본적인 사고 구조는 생태학에 더 가까운 듯하다. 인간이라는 개체를 자연의 일부로서 이해하고, 인간의 정신적 요소를 자연과의 상호 작용 속에서 해명하려 한다. 혹자는 명리학을 '하늘의 원리에 대한 공부', 혹은 '시간의 흐름에 대한 연구'라고 설명한다. 훌륭한 해석이다. 다만 하늘의 원리를 가늠하고 시간의 흐름을 관찰하는 행위가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는 점에서는, '하늘학', '시간학'보다는 역시 '인간학'이다. 좀더 그럴듯 해보이는 이름을 붙이자면 '생태학적 인간학' 혹은 '생태학적 심리학'이라 할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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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에 좀처럼 집중이 안 되어 국화차를 한 잔 우려내어 마시는 중이다. 국화꽃을 송이째 포슬포슬 말려서 뜨신 물에 우려내는 국화차는, 커피밖에 마실 줄 모르는 내게, 종종 외도하고 싶은 맘을 불러일으키는 유일한 차이다. 그리고 국화차를 마실 때면 나는 보경스님이 생각난다.

이십년 가까운 과거의 일이 되었다. 기자생활에 지쳐가던 중 연애사마저 꼬여서 골치아프던 주말, 혼자 심야 버스를 타고 지리산 실상사에 갔다. 칡흙같이 어두운 새벽에 산사에 도착했다. 아침 예불은 하는 둥 마는 둥, 원주 스님에게 인사만 슬쩍 드리고, 객간 구석방에서 염치없이 한숨 푹 자고 일어나자, 해는 중천이오, 시간은 점심 때다. 제딴에는 일상에서 도망친답시고 지리산까지 내려왔는데, 절간에서 뭘 할까. 막막한 맘에 산 쪽을 흘긋 보니, 한 스님이 숲 속 오솔길에서 날듯이 날렵하게 걸어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순식간에 객간까지 온 스님은 바랑 가득히 국화 꽃송이를 들고 있었다. 웃으면서 나를 보고 합장을 한 스님은, 국화차를 만들 거라며 곧 마루에 꽃송이를 널기 시작했다. 꽃냄새가 향긋했다.

보경 스님은 몸이 작고 잘 웃었다. 성직자들이 흔히 갖는 위선과 권위가 없었고, 천진난만함에는 비겁함이 없었다. 원주 스님으로부터 들어서 내가 누구집 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했다. 또 엄마가 불교 잡지에 기고한 수행에 관한 글을 읽은 적도 있다고 했다. 우리는 며칠 전에 말려놓았다는 국화를 우려 차도 마시고, 엄마 얘기도 하면서 조금 친해졌다.

이튿날, 서울로 가는 길에 남원까지 스님과 동행하게 되었다. 동행길에 스님은 묻지도 않았는데 자기 얘기를 시작했다. 속세에서는 체육을 전공했다고 했다. 무언가 계기가 있어 삶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머리를 깎았는데, 참선을 해도, 경을 읽어도, 집중이 잘 안 되고, 수행의 길이라는 게 무엇인지 도통 모르겠다고 했다. 앞으로 조금만 더 해 보고 안 되면 다시 속세로 돌아갈까, 그렇다면 자기는 태릉에서 레크레이션 강사를 하고 싶다고도 말씀했다. 나는 속으로 "나같은 어린 보살에게 이런 얘기까지 털어놓다니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닌가 보다"라고 딱하게 생각했다. 남원에서는 서울행 버스에 타기 전에 밥집에 들렀다. 갖은 반찬, 찌개에 조기 한 마리 구워나오는 점심 정식을 먹었다. 스님은 살생은 안 된다며 조기 구이에는 손도 안 대면서, 계란찜은 맛있게 드셨다. 나는 또 속으로 "계란도 육식의 일종 아닌가.." 하면서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렇게 밥을 먹고 헤어진 뒤 스님을 다시 만나지는 못했다. 나중에 들은 바, 그가 엄마에게 수행 방법에 대해 묻는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고 한다. 엄마가 답장을 했는지, 했다면 뭐라고 썼는지는 나도 모른다. 또 그 후에 들은 바, 스님은 결국 속세로 돌아오지는 않았는데, 그보다 더 비극적인 종말을 선택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승려로서 보경 스님은 참 덜되었다. 신도에게 수행의 고민이나 털어놓고, 속세에서 어찌 살았는지도 속속들이 얘기하고 (승가의 금기 사항이다), 계란찜도 잔뜩 먹었을 뿐 아니라,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서 살생을 저질렀다. 그는 왜 삶을 포기했을까. 풀리지 않는 수행 고민 때문이었을까. 그 속을 어찌 알겠냐만은, 그 맑고 천진난만하던 사람이 스스로의 생명을 포기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아리다. 오늘도 국화차를 마시니 보경 스님이 생각난다.


나혼자 산지 벌써 일년 반이 넘었다. 마포서 출입하던 경찰 기자 시절, 신촌에서 자취한 게 일년 못 채웠으니, 독거 경험으로는 최장 시간을 갱신 중이다.

90년대말 자취했을 때에는 1년 동안 가스불을 켜 본 게 두번쯤 될까 말까 하니, "스스로 취사=자취"라 하기도 좀 뭐한, 말그대로 "독거"일 뿐인 나날이었다. 경찰 기자의 하루일이라는 게, 일찍 끝나야 오후 9시, 걸핏하면 밤샘에 야근이었으니, 취사 의지가 있어도 (냄비는 하나 사놓았었다) 좀처럼 실행에 옮기기 어려웠다. 20년전 신촌은, 요즘 홍대 앞처럼 한밤중까지 불이 꺼지지 않는 시끌벅적한 젊은이의 거리였다. 자취하던 원룸에서 엎어지면 코닿을 거리에 밥집, 맥주집, 24시간 포장마차 등이 포진해 있었으므로, 밥짓는 수고를 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도어스" "케사르"와 같이 음악 빵빵하게 틀어주는 술집들을 전전하며 혼자 술을 마시곤 하던 것도 그 때 즈음이다, 그러고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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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와 비교하자면, 요즘은 "독거"가 아니라 엄연한 "자취"이다. 혼자 밥도 지어 먹고, 손이 많이 가는 반찬도 만들어 냉장고에 넣어둔다. 세탁도 쌓이기 전에 해치우고, 주변 정리도 허투로 하지 않으며, 술도 집에서 혼자 마신다. 부지런해졌다기 보다는, 주변 환경을 최대한 "제대로" 갖추어 놓음으로써, 홀로 사는 피폐함을 조금이나마 극복해보자는 노력의 일환이다. "늘 혼자 있기"는 아직 익숙치 않지만, 혼자 버틴 일년 반동안 나름대로의 방식을 터득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김치 담그기는 나의 "독거" 생활의 비밀 병기이다. 작은 항아리에 꽉 찰 정도의 분량을 만드는 정도이지만, 장보고 배추 절이는 시간까지 더하면, 한 나절이 꼬박 걸리는 노동이다. 외부 일정이 없는 날로 특히 시간을 내서 담근다. 고생을 감수하며 김치를 담그고 나면, 나의 일상이, 식탁이, 또한 정신 상태가 "제대로" 라는 점에 대해 스스로 납득하고 안도하게 되는 것이다. 직접 담근 김치가 시판 김치와는 맛이 딴판이라는 점도 중요한 포인트이다. 맵지 않고 시원한 이북식 김치는, 일본은 물론이거니와 한국에서도 돈주고 살 수 없는 맛이다. 바깥에서 먹고 들어올 때도 많아서, 맛있는 시기를 넘겨서까지 먹어야 할 때가 많지만, 내가 만든 이북식 김치가 냉장고에 있으면 괜히 부자가 된 듯하다.

나의 경우에는 김치 담그기가 비밀 병기라지만, 수많은 독거자 혹은 독신자들은 어떤 비책으로 나홀로의 삶을 견디는지 궁금하다. "나혼자산다"라는 TV 프로그램을 애청했었는데, 데프콘이 하차한 이후에는 "홀로 살기"보다는 "함께 하기"로 컨셉이 바뀐 듯해 시큰둥하다. 맨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는 얘기만 나오니, "홀로 살기"를 거부함으로써 "홀로 살기"를 견디라는 얘기인가, 결국 나홀로 삶을 유지할 방도가 없다는 얘기인가. 뭐 비밀 병기라는 게 괜히 비밀 병기라 하는 게 아니겠지만은, 암튼 뭐 좀 그렇다.


연구실
from 잡담/ Miscellaneous 2012/06/18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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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기자 시절 장 명수 선배가 "내가 오랫동안 바랬던 것은 편집국 한 구석에서 글을 쓸 수 있는 나만의 작은 데스크"라고 회고했던 것을 새삼스럽게 떠올렸다. 그는 회사 대선배이자, 언론계에 팽배한 여성에 대한 편견을 이겨낸 "여기자"이자, 존경할 만한 언론인이다. 80년대 "여기자칼럼"이라는 타이틀로, "여기자"로서는 최초의 개인칼럼을 썼다. 편집국에서의 별명은 "장칼"이었다. 본인 주장 "장명수" "칼럼"이어서 "장칼"이었다는데, 후배들은 "칼처럼 서슬퍼런 저널리스트"여서 "장칼"이라고 생각했다. DJ정권 이후 몇 번이고 입각 요청을 받았지만 "내 길이 아니다"라고 끄떡도 하지 않았고, 한국일보 주필, 사장을 역임했다. 권력과 거리를 둘 줄 모르는 언론인의 행보에 눈살을 찌푸리는 요즘, 그의 기백을 다시금 생각한다.

"여성인 내게 조직은 여간해서 기회를 주지 않았다. 남성 동기가 승진하고 출세하는 것을 그저 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라고 담담하게 회고하는 장 선배이지만, 편집국 생활은 실상 무척 고되었을 것이다. 내가 기자질을 하던 90년대만해도 여성에 대한 편견이 만만치 않았다. 특종을 하면 "여기자라 취재원이 잘 봐줘서 그런다"는 뒷말을 들었고, 낙종을 하면 "여자는 역시 안 된다"는 빈정거림을 들었다. 밤늦게까지 경찰, 검찰과 씨름하고 새벽에 영안실을 챙기는 취재보다, 조직의 편견과 차별을 견디는 것이 열배는 더 고통스러웠다. 하물며 60년대에 입문한 장 선배는 어떠했으랴. 그런데 남성 중심적인 분위기에 대한 불만으로 하루가 멀다고 좌충우돌이던 나와는 달리, 그는 항상 온화하고도 침착했다. "외유내강"이야 말로 내가 갖추지 못한 덕목이라는 것을 느끼게 하는 선배였다. 그래서일까. 그는 마초인 "남기자"들이 진심으로 선배로 모시는 유일한 "여기자"였다. (다시 말하자면, 마초인 "남기자"들은 나이 경력 무시하고 "여기자"는 선배로 생각하지 않았다). 한국일보 사장으로 취임한 이후, 벤처 기업에서 일하고 있던 나를 수송동 회사 사장실로 불러서 "다시 기자를 하지 않겠느냐"고 권해주셨던 것은 참으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나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그 권유를 거절했다. 장 선배 개인에 대한 거절이 아니라, 구시대적 발상에서 도저히 벗어날 것 같지 않던 저널리즘에 대한 거절이었다.

장 명수 선배는 편견이 가득찬 저널리즘 바닥에서 스스로 만족할 때까지 버티어냈다. 그가 꿈꾸었다던 "편집국의 작은 책상"은, 조직의 편견을 이겨내고 동료에게 인정받는 언론인이 되겠다는 포부의 은유였을 것이다. 반면 나는 시대착오적으로 느껴지던 저널리즘을 끝까지 참고 견딜 의지도 자신도 없었다. 나는 오랜동안 인내해야 하는 힘든 길보다는,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해서 움직여도 되는" 약간 편한 길을 선택했다. 나도 오랜동안 "사고하고 글을 쓸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을 소망했지만, 이는 거친 언론계를 버리고 온건한 연구자의 길을 택한 타협의 은유였다. 장 선배가 "여기자칼럼"을 쓰기 시작한 것은 40세. 장 선배의 언론인 본방은 "여기자칼럼"에서 시작되었다면, 나의 본방도 이제 시작이다. 나는 곧 41세가 된다. [사진은 북향인 나의 연구실에서 내다본 풍경]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트위터나 FB 등 소위 소셜 미디어라는 공간에서 발언하는 것이ー그게 어떤 내용이든ー내겐 불편함을 동반하는 이유에 대해서. 아마도 "나"의 얘기를 하기엔 "남"과의 거리가 너무 가깝게 설정되어 있다는 점일 것이다. 비사회적이랄 정도는 아니지만, 그다지 사교적이지도 않은 내게는, 그 공간의 "사교성"이 익숙치 않다. 대화 중에 상대방의 숨결이 신경쓰이거나, 상대와의 물리적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눈이 사팔뜨기가 될 지 모른다는 식의, 막연한 안절부절함을 느끼게 하는 공간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문득, 20년전 대학시절 매일같이 녹두거리에서 술잔을 기울이던 친구가 무척 그리워졌다. 우리는 여러가지 얘기를 나누었다. 난 그 친구가 궁금했고, 그 친구도 내 얘기를 잘 들어주었다. 종종 의견이 달랐지만 그건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는 친구의 눈치를 볼 필요도, 굳이 약한 모습을 보일 필요도, 마음에도 없는 위로를 할 필요도 없었다. 그도 그렇게 하지 않았고 나는 그게 편했다. 우리는 정치적 성향이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인생의 선택을 해왔고, 성격적으로도 그다지 닮지 않았다. 하지만, 둘 다 "비사회적"이지만, "호기심"과 "논리적 지식욕"이 왕성하다는 점에서 실은 아주 똑같은 종류였다. 즉, 그 친구의 "비사교성"은 나를 가장 편안하게 해 주는 덕목이었다.


자매
from 잡담/ Miscellaneous 2011/10/13 12:23
며칠간 만화 그리는 동생이 왔다 갔다. 연년생이어서 어렸을 땐 하루가 멀다하고 티격태격했었는데, 나이가 드니 완전 동년배 친구다. 이젠 며칠 같이 놀고 먹어도 사이좋게 잘 지낼 수 있다는 것. 우리집에선 가족 형제끼리 술자리는 안 하는데, 이번엔 드물게 동생과 와인도 한 잔 했다. 어렸을 땐 맨날 둘이 나란히 앉아서 만화만 그렸었다. 동생은 꿈을 실현해서 만화로 먹고 살 수 있게 됐고, 그 꿈이 좌절된 나는 인생 대부분의 시간을 언어와 티격태격하면서 살고 있다. 동생은 내년엔 웹툰공모전에도 작품을 내볼까 싶단다. 나도 그즈음까지 원고를 끝내야지. 그리고 유럽으로 먹보 여행을 떠난다. 자매의 의기투합은 계속된다. 후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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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from 잡담/ Miscellaneous 2011/06/21 23:19
얼마 전 문득 다녀온 제주도. 나에게는 좀 특별한 의미로 기억되는 섬. 마지막 가족 여행지.
몇년전에는 아무 음식점이나 쓱 들어가서 먹어도 맛있었던 섬. 지금은 청담동이냐 서초동이냐 싶은 도시풍 음식점이 으스대면서 영업하는 지역. 의미불명의 테디베어 박물관이 인기있는 불가사의 공간. 어깨에 힘들어간 히피풍 관광객이 혼자 커피를 즐기는 무인카페가 문제없이 돌아가는 동네. 대기업이 녹차밭을 조성하면 명소가 되는 관광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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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참 좋긴 한데, 내겐 잘 이해되지 않는 복합공간이다. 제주도는 "가족과의 특별한 만남". 그것만은 틀림없을 것 같은데 말이다.


오랜동안 숙제였던 www.yonnie41.com 업데이트를 마쳤다. 염두에 두고 있던 몇 가지를 완전히 구현하지 못했으므로 앞으로 개선을 염두에 두고 ver 6.0으로 명명했다. 이번 업데이트에 크게 도움을 준 몇몇 분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를. 

・動虎
・TatterTools
・결벽증 스킨
・알FTP
・...

앞으로 www.yonnie41.com은 아주 약간 전문성을 담은 글을 중심으로 운영해보고자 한다. 모쪼록 지금까지처럼 소수의 지인들에게만 종종 생각나는 사이트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