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Posts in '리뷰/レビュー/review' category

  1. 기묘한 관람 경험 2015/12/22
  2. 윤종신 2012/02/03
  3. "나꼼수"에 대한 단상 2011/11/04
  4. 카프카 이야기 3 2011/10/31
  5. SF팬은 아니지만 (2) 2011/09/16
  6. 한류잡담 2011/08/08
  7. 映画「まほろ駅前多田便利軒」 (2) 2011/05/12
  8. 로빈슨 크루소 2009/09/16
  9. "마루젠"의 하이라이스 2009/05/12
  10.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 2006/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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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연시, 흔히 접하기 어려운 퍼포먼스를 두 편 감상했다.

흔히 접하기 어려운 퍼포먼스를 두 편 감상했다. 하나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 영화, '청춘의 십자로' (금강키네마 1934년작, 원작 감독・각본・편집: 안종화). 한일국교 정상화 50주년 기념으로 도쿄국립근현대미술관 필름센터에서 개최한 <한국영화 1934-1959:창조와 개화>상영회 (그림 왼쪽이 팜플렛) 에서 귀중한 관람 기회를 얻었다. 유성 영화 '미몽 - 죽음의 자장가' (감독: 양주남)가 1936년작이니 이 영화는 한국 무성 영화의 끝자락이라 봐도 무방하리라.

따분하게 무성 필름을 상영한 것이 아니라, 변사의 나레이션을 덧붙여 뮤지컬풍 퍼포먼스로 재구성, 상영했다. 전체적인 연출은 김태용 감독. 시나리오 없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수백번 필름을 돌려보며 애를 먹었다는 설명이다. 그닥 내 취향이 아닌 그의 영화와는 달리 퍼포먼스는 인상적이었다. 어쩌면 흠잡을 데 없는 배우 조희봉의 재치있는 변사 연기 덕이었을 지도 모른다. 한 마디의 대사도 더듬거나 주저하는 법 없이 성큼성큼 극중 세계로 이끄는 나레이션 덕에 60여분의 관람은 지루한 순간이 없었다. 1930년대 경성 시가지 구경이나 할겸 가벼운 마음으로 가 본 상영회인데, 오랜만에 신파 연애극에 푹 빠져 보았다.

또 하나는, 에도가와 란포가 1929년에 발표한 단편소설 '押絵と旅する男' (오시에와 여행하는 사나이 ・'押絵'(오시에) : 헝겊 등 물건을 덧붙여서 입체적으로 표현한 회화의 일종)의 낭독 연극. 요츠야산초메의 으슥한 뒷골목에 자리한 '喫茶茶会記(킷사・사카이키) 는 음향 매니아임에 틀림없는 주인장의 취향이 돋보이는 기괴한 놀이 공간인데, 에도가와 란포의 소설 낭독회가 열리기에는 더없이 어울리는 곳이다. 90여분간의 1인 낭독 연극은 훌륭했다. 40여명이 앉으니 꽉 들어찬 작고 어두운 방이 은밀하고 그로테스크한 상상력의 공간으로 탈바꿈하는 경험을 했다.

두 관람 경험은 관계가 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다. 원 작품의 시대적 배경이 1920~1930년대라는 점, 전자는 한국 영화라고는 해도 식민지 시대에 만들어진 만큼 일본 사회, 일본 영화계의 영향을 받았음에 틀림없다. 그런데 나는 그보다도 구전 (oral) 방식으로 재구성된 퍼포먼스의 강렬한 감각을 좀처럼 잊을 수가 없다. 어두운 공간, 반짝이는 스탠드 조명 속, 오로지 육성으로만 전달 가능한 미세한 진동과 울림, 절제되고 생략된 시각적 볼거리가 결합된 퍼포먼스는 깜짝 놀랄 정도로 감각적이고 매혹적이다. 이 강렬하고 쾌락적인 구전 (oral) 오락이, 그깟 유성영화의 어색한 모션과 초라한 사운드에, 방에 틀어박혀 묵묵히 책을 읽는 고독한 향유에 밀려난 이유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다.


윤종신
from 리뷰/レビュー/review 2012/02/03 17:09
요즘 자주 듣는 노래들. 20대 실연당하고 풀죽어다니던 시절 이후, 아주 오랜만에 윤종신 세계에 위로받는다는 느낌이랄까. 이제(야) 나도 "정서적"인 인간이 된 건가!


장재인 보컬도 좋지만, 조정치 편곡이 죽인다.


하몬드오르간이 분위기 잡고, 부라스가 분위기 띄우고. 아주 은근해.


유희열이 노래를 참 잘 한다는 거 처음 알았다. 음.. 어쩌면 노래는 "가창력"보다 "감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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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론" 강사로 출강중인 모여대에서 "나꼼수"를 소개한 아사히신문 기사를 나누어 주고 짧게 토론을 했다. 이날의 강의 주제가 "Twitter journalism”에 대한 내용이었던 참이었기에 잘 됐다 싶어서 토론 소재로 "나꼼수"를 소개했던 것이다. 【←10월25일자 아사히신문, "나꼼수" 기사. "한국, 인터넷 라디오가 선풍적 인기"라는 타이틀. 이명박 정권을 비판, 풍자하는 인터넷 라디오의 청취자가 급증. 여야당의 유력한 지도자가 연이어 이 프로그램에 출연. 격차 사회에 불만을 느낀 젊은 층의 지지가 강력한 만큼 내년 대선까지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않겠는가, 라는 보수일간지 관계자의 코멘트를 곁들여서

수업에서는 심도있는 토론을 할 만한 시간적 여유는 없었지만, 학생들은 의외로 몇 가지 진지한 질문을 제기했다.

…질문> 어떤 사람들이 듣나요?
…질문> 인터넷 라디오 "나꼼수"에 때문에 잡혀간 사람은 없나요? 규제를 한다는 움직임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요?
…질문> "나꼼수"가 실제 선거에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나요?
…감상> 젊은이들이 정치에 대해 그렇게 관심이 많다니 놀랍네요.

한국사회에 내재한 울트라초강력한 정치사회적 경험을 공유하지 않은 외부 시각에서 던질 수 있는 질문이란 대체로 이런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이 "기본적"인 질문들이 시민 사회와 미디어의 구도상에서 "문제시"되어야 할 몇 가지 지점을 제대로 짚었다고 느꼈다. 예컨대, "누가 듣는가"라는 질문. 한국사회 일원에게는 뻔한 질문이다. 그보다는 현 정권의 비리를 폭로하거나, 혹은 "나꼼수"의 스타4인방의 통쾌한 유머감각과 신랄한 분석, 인간적 면모를 설파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실제로 "나꼼수"를 누가 왜 듣는가, 라는 문제는 좀더 파고들 필요가 있다. 인상론적으로 "젊은이들이 좋아하지"라고 안이하게 보아도 될 것인가. 만약 그러하다면 세대 문제의 정치적 국면을 면밀하게 검토할 필요는 없을까. 팟캐스팅이라는 형식이 청취자의 형성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 것인가 등등. 혹자는 현 정권의 비리와 폭거, 기존 미디어의 잘못된 행태가 이와 같은 사태를 만들었다고 주장할 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충분히 공감하는 반면, 정권의 비리와 폭거, 기존 미디어의 잘못된 행태가 존재하는 것은 단지 한국 사회 뿐이 아니라는 점에서, 완전한 설명은 될 수 없은 분명하다.

일본의 젊은이들은 한국의 젊은이들에 비해 새로운 미디어에 대한 부정적이다. 3.11 동일본 대지진 이후, 일본 사회에서도 Twitter 나 Mixi등 소셜미디어의 "대안 저널리즘"으로서의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으나, 이에 대한 젊은이들의 의견을 물으면 "근거 없는 사실의 유포", "불필요한 불안감의 확산" 또는 "개인정보 유출의 위험성" 등 부정적인 담론이 절반 이상이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의 젊은이들이 소셜미디어 자체에 대해 배타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취직 활동이나 취미 활동 등 다방면에서 잘 활용하고 있고 매우 친숙하다. 일본은 스마트폰이 보급되기 훨씬 전부터 모바일 미디어를 통해 인터넷을 사용하는 문화가 자리잡은 곳인 만큼, 소셜미디어가 사회적인 흐름으로 인지되기에는 "기술적 신선함""새로움"이 결여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에 비해 한국의 "나꼼수"는 "새롭다". 정권 "꼼수"의 기발함, 콘텐츠의 신선함, 4인방의 대담함, 스마트폰의 새로움, 그리고 음성미디어의 오랜만의 부활. 이런 "새로운 느낌"이야 말로 개인에 내재한 경험으로서는 중요한 것이지만, 단지 "새로움"만을 대변하는 현상이나 단순한 정치적 담론으로 환원하는 것은 아쉽다. 시민사회와 미디어, 기술 현상과 정치적 담론 - 미디어론적 담론 속에서 "나꼼수"를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카프카 이야기 1
카프카 이야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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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가 동성애자였다는 식의 이야기는, 근거는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작품을 이해하는 데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작가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 그가 겪었을 지 모르는 심리적 외상에 관심을 갖는 것은 타당하다. 허나, 카프카의 작품에서 묘사된 보편적 사회관계에 대한 불편함을, 성적 소수자로서 겪어야 했던 소외감으로 축소해서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카프카의 동성애적 "감성"은, 일기나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주 발견된다. 실제로 그렇고 그런 사이가 아니었겠는가라고 추정되는 인물 중 한 명은 막스 브로드 (역시 소설가이며, "내가 죽으면 원고를 태워달라"는 카프카의 부탁을 저버린 친구). 그리고 또 한 명은 그는 카프카를 유대 연극의 세계로 이끈 장본인으로 추정되는 잭 레비라는 인물 (그의 인생은 많은 것이 베일에 쌓여 있다. 유대인 연극 집단에서 활동을 했었고 1945년 바르샤바의 게토에서 죽었다고 한다). 이 두 남자(, 그리고 아버지) 와의 관계가 카프카에게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다. 하지만, 카프카가 그들 중 누군가와 연인이었다고 보기는 좀 어렵다. 그는 외로움에 사무쳐서 글을 쓴 작가인데, 짧은 인생에 많은 글을 남겼다. 그의 인생이 외로웠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 글을 쓸 때 참고한 책
• "Letter by Franz Kafka to Max Brod", in Kafka, F. The Metamorphosis, translated by s. Corngold (1972). Bantam.
• 粉川哲夫(1990)「カフカと情報化社会」未来社=코가와 테츠오(1990), "카프카와 정보화사회" 미래사 (미번역)


SF팬이랄 것은 없지만 SF영화를 볼 때에는 제멋대로 분석하고 상상하는 편이라, 요것조것 지껄이고 싶은 게 많이 생긴다. 적어두자. 최근 본 < Brazil >을 기념할 겸.

• 80년대 SF영화의 명작으로 꼽히는 < Brazil (1985, 감독 테리 길리엄) >을 얼마전에 보았다. 80년대 영화답게 스피디한 느낌은 없지만 꼼꼼하게 잘 만들어진 영화. 충격적이지는 않지만 (그러기엔 그 이후에 나온 SF물을 너무 많이 보았다), 전혀 지루하지 않다. 개봉 당시에 보았으면 어땠을까. • 영화를 보면서 멋대로 계보를 만드는 게 습관이라면 습관인데, 이 영화는 < A clockwork Orange (1971, 스탠리 큐브릭) >와 < Blade Runner (1982, 리들리 스콧) >를 이어 받되 경박한 골계미를 더했으며, 몇몇 미장센은 < Kafka (1991, 스티븐 소더버그) >나 < Delicatessen (1991, 장 피에르 주네 등) >로 이어지는 환타지 계열 SF물에서 재활용된 것 같은 느낌.

• 예컨대 < Brazil >에서 세트의 설정이 맘에 든다. 포드주의를 풍자한 채플린 영화에 나옴직한 "기록국 (Department of Records)"의 풍경이라든지, < Kafka>에도 자주 등장한 덕트를 이용한 편지통 커뮤니케이션. 번잡하고 왁자지껄한 "기록국"과는 대조적으로 작은 "방"으로 구성된 "정보검색국 (Information retrieval chamber)"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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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Brazil 의 한 장면]

• 테리 길리엄의 최근 영화 중에서는 < The Imaginarium Of Doctor Parnassus (2009) >이 인상적이지만, < Brazil >처럼 직접적이고 소박하게 상상력을 펼쳐 보인 영화가 더 좋다. 그나저나 < Brazil >의 한국어 제목은 도대체 왜 <여인의 음모>인걸까. 이것이야 말로 이 영화에 대한 누군가의 음모가 아닐까.

• 우리나라에서는 <고무인간의 최후>라는 괴상망칙한 제목으로 더 유명한 < Bad taste (1987, 피터 잭슨) >는 내가 두눈 뜨고 본 유일한 스플래터 영화인데 (그렇다, 난 블러디한 영화는 두 눈 감고도 못보는 겁쟁이인 것이다), 걸작이라고는 못하겠지만 잭슨 감독의 가장 유쾌한 작품이기도 하다. 최근 < District 9 (2009, 닐 블론캠프) >를 보고 비슷한 느낌의 통쾌함을 느꼈다. 멋대로 대결 구도를 만들어 보자면, 터미네이터나 매트릭스류의 "심각하다 못해 인류를 다 멸망시키거나 또는 구원해야만 하는" SF내러티브에 대한 반(反)내러티브랄까. 통쾌하다.

• "출중한 상상력"이라는 측면에서 나의 아낌없는 사랑을 받고 있는 영화는 길에르모 델 토로 감독의 < El Laberinto Del Fauno, Pan's Labyrinth (판의 미로, 2006) >. 이 영화에 나오는 해괴한 생물체을 만들어낸 상상력은 대단한 수준이다. 그 상상력은 최근 몇 년간 늘어난 괴물과 싸우는 류의 영웅 영화나 시시껍적한 환타지에서 여러 차례 재활용, 삼활용되고 있으니 사실 SF상상력은 돌고 도는 것이란 사실을 여기에서도 확인. 피터 잭슨 감독 대신 메가폰을 잡은 <호빗 (내년 개봉 예정)>에 큰 기대중.

이상.


워싱턴에 사는 친구와 오랜만에 30분이나 수다를 떨었다. 친구 왈 "장근석에 푹 빠진 내 맘 알아주는 사람이 없구나" 하는 거다. "난 알지 난 알아, "베토벤 바이러스"와 "미남이시네요" 봤는데 녀석 정말 귀엽더구나" 했더니 어찌나 반가워하던지. 초등학교 3학년 된 딸내미랑 함께 "미남이시네요"를 보는데, 딸내미는 영어 자막으로 이해하는 데도 재미있어 한단다. (미국인) 남편이야 ..뭐...짜증나겠지. 그러고 보니, 베이징에 사는 다른 친구는 (영국인) 남편이 눈살 찌푸리는데도 아랑곳없이 "비" 콘서트에 달려간다고 했었고, 지난해 뉴욕의 친구네 집에 놀러 갔을 땐 부부 함께 드라마 "추노"에 푹 빠져 있었었다.

보고 싶은 영화는 먼 거리라도 가서 보는 편인데, 드라마나 최신음악을 스스로 찾아서 보고 들은 적은 그다지 없었다. 그런데 한국을 떠난 뒤 "한류"가 내게도 중요한 키워드가 되어버렸다. 알아두지 않으면 대화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욘사마 멋조요" 라는 아주머니들에게 "전 겨울 연가를 안 봐서.."라고 땀을 빼거나 , "KARA가 한국에서도 인기 있나요?"라고 묻는 학생들에게 "미안.. 모르겠는데.."라고 답해야 하는 난감한 상황이 되는 것이다. 모 국제워크샵으로 마닐라에 갔을 때, 필리핀 태국 중국의 대학생들이 함께 "원더걸스" 노래에 맞춰 춤을 추는 걸 보고, "어, 이 노래 한국말 아냐?"라는 뜬금없는 발언을 하곤 나도 좀 쑥스러웠다. 그래서 요즘엔 관심을 갖자고 노력하고 있다. "미남이시네요"도 보고 "베토벤 바이러스"도 보고... 아니다, 일본의 공중파 방송에서 어찌나 한국 콘텐츠를 돌려대는지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NHK에서는 "한류 엔카" 특집 방송을 하고, 웬만한 민영 방송에서도 한국 드라마는 하나 이상 정기 편성하며, BS나 케이블TV에서도 비슷한 추세라고 하니, 도쿄 살면서 한류 피해갈 수 있나.

재외 동포들이 모국 컨텐츠를 즐기는 것이야 그럴 수 있다 하지만, 해외에서 살면서 이 정도 얘기를 듣다 보면 소위 "한류"라는 게 심상치 않은 현상이구나 라고 느끼게 된다. 컨텐츠의 퀄리티를 논할 정도로 대중 문화에 밝은 건 아니지만, 기획과 마케팅을 동원해서 "저속한 상업 문화"의 완성도를 극대화하면 요즘 세상에서 "킬러 콘텐츠"가 된다는 것을 실감한다.  엊그제 일본 후지TV 방송국에서는 "한류 편파 편성에 반대하는 시위"가 있었던 모양인데, 후쿠시마 원전 사태와 관련한 시위에도 참여자가 그닥 많지 않은 이 사회에서 더운 날 데모까지 하는 적극성에 감탄. 미국 뉴욕이나 LA에서는 "한류 이벤트 촉구를 위한 플래쉬몹" 이 있었다는 소식에도 느낀 바이지만, 대중문화라는 게 요즘 사회를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키워드가 되었다는 생각을 굳히게 된다.

사실 "한류"를 이해한다는 게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한류"를, "한국"의 콘텐츠라고 해석하는 한국(따라서 환영)이나 일본(따라서 퇴치)의 국가주의자들도 있을 수 있고, 수출용 "상품"(따라서 합리적, 경쟁적)으로 보는 미디어 산업주의의 시각도 있을 수 있으며, "저급한 문화"(따라서 비교육적)로 보는 학부모 어르신의 걱정도 있을 수 있고, "가족들로부터 얻을 수 없는 로맨티시즘"(따라서 정서적 위안)으로 보는 아줌마들의 현실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대중문화를 논해야 하는 지평도 다양하다. 또 하나의 "오리엔탈리즘 (E. Said)" 일수도 있고, "탈구조주의적인 글로벌 문화 현상 (A. Appadurai)"일 수도 있으며, "국가 정체성을 강화하려는 문화 프로젝트(K. Iwabushi)"로서 90년대 아시아에서의 일본 문화 인기의 계보를 이은 것일 수도 있고, "인터넷이나 UCC의 힘을 반증하는 뉴미디어 현상"(C.Jenkins)"일 수도 있다. 하나하나가 매우 복잡한 얘기이고, 논란을 동반할 것이다. 

즉, "한류"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라는 물음에 답하기 전에 우선, "서로 상반될 수 있는 다양한 시점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물론, 언제나 그렇듯, 이렇게 당연한 전제가, 한국의 담론 구조에 있어서 여전히 결여되어 있는 듯이 보인다. 그게 내게는 제일 불편한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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映画「まほろ駅前多田便利軒」を観た。

ちょうど18時過ぎた頃。仕事帰りに通りかかった有楽町スバル座の案内塔のポスターを見て即時チケットを購入。レディーズデーだったし、雨だったし、独りで映画館に行くには最適の条件だったもの。

物語り自体はあまり好みではなかった。けど、街(まほろ市という名前の仮想の街)の風景や登場人物、控えめの台詞などに何とも言えない独特な情緒がしみており、それが楽しかった。2時間で終わってしまうのかと思ったらさみしかった。30代半ばのバツイチを演じた英太と松田龍平は、汚い格好でもずっとカッコ良い。それが妙に非現実的でこの映画が娯楽コンテンツであることを時々気づかせてくれる。あまり真剣にならなくて楽しめる映画であるわけだ。ディティールを傷つけず、「小さな物語り」を繊細に描き出せるところ。私の日本映画の一番好きなところがよく出ていた。

有楽町スバル座は初めてだったけど、さすが1946年オープンした古風なところでかなりの気に入りとなった。常連になりそうな予感。


루소는 '"나는 책을 싫어한다"고 공언했다. 루소는 "책은 우리에게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것을 말하도록 가르칠 뿐"이라고 주장했다. 정작 책으로 유명세를 얻었으면서 책에 대한 혐오를 표현한 루소는, 앞뒤 복잡하게 따지지 않는 솔직한 표현자였으리라.

한편, 루소는 "많은 책 속의 가르침을 흥미있게 어린이에게 결합시키는 방식은 없을까?"라고 진지한 고민을 토로하기도 한다. 그가 책의 가치를 폄하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다만, 교육이랍시고 어린이들에게 이것저것 억지로 읽히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루소가 추천하는 책도 있었다. 그에 따르면, 그 책은 "자연을 다른 교육에 관한 가장 편리한 이론을 갖춘 책"이고, 그 책이야말로 "성장하는 동안 판단력을 시험하는 기준이 되고, 읽을 때마다 즐거움을 주는 놀라운 책"이다. 그 책은 무엇인가. 뜻밖이라 해야 할까, 안도해야 할까, 그 책은 <로빈슨 크루소>였다.
로빈슨 크루소는 고도에서 아무의 도움도 받지 않고 아무런 도구도 없이 자신을 보호하고, 나아가서 어느 정도 행복까지도 얻고 있었다...(중략)... 이 소설은 즐거움과 동시에 교훈을 줄것이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경우에 필요한 것을 단순히 책에서가 아니라 실제로 자신이 경험하여 좀더 자세히 배우기를 바란다. 또한 자신이 로빈슨이 된 기분으로 모피옷에 커다란 모자를 스고 큰 칼을 차고 필요없는 우산까지 사용해서, 로빈슨의 기이한 차림을 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를 바란다... (「에밀」("Emile, ou l'education",1762)
나는 오래전부터 "사람은 로빈슨 크루소와 같이 살아갈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자녀를 낳은 것도 아닌 처지에 술자리에서나 지껄여오던 땅콩 철학을, 루소와 같은 대학자에게 확인 받았다는 생각에 기뻤다. 내가 <로빈슨 크루소 교육>을 지지하는 입장은, 생물로서 해결해야만 하는 "신체적 과제"(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먹고 입고 배설하는 신체적 안위 및 편의에 관한 문제들)를 해결할 줄 모르는 개체는 존속의 가치를 주장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에밀」을 좀더 깊게 읽어보면, 루소가 "로빈슨 크루소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논지는 나의 생각과도 거리가 있다. 루소는, 로빈슨 크루소를 사례로 들면서, 시장의 논리에 의존하는 경제 체제에 대해서 비판을 가한다. 그에 따르면, 시장 경제는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현실적으로 필요한 도구보다도, 장식적 가치로만 평가되는 장신구에 더 높은 가격을 매기므로 모순적이다.
가장 쓸모 있는 기술은 가장 빈약한 보수를 받고 있다...반면 한가한 사람과 부자만을 위해 일하는 소위 에술가라는 작자들은 불필요한 물건에 엄청한 가격을 매긴다... 부자가 그러한 것을 중시하는 이유는 유용성 때문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이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적인 유용성과 무관한 엄청난 비싼 가격을 보고, 어떤 물건이 값이 비쌀 수록 가치가 없다며, 그들 기술의 진정한 가치와 사물의 현실적인 가치에 대해 어떤 판단이 가능할 것인가.. 로빈슨은 쓸모없는 장신구보다 도구를 훨씬 더 아끼고 도구를 만드는 사람을 존경한다. (같은 책)
루소의 교육관은 "생물로서 살아가는 데에 실용적인 것을 가르치라"는 것이다. 쓸데없이 "행복을 추구하라"라든가, "사랑을 하라" 라든가, "정신적 고양이 중요하다" 등을 강요하는 사회는 "옳지 않다"라는 주장이다. 종교적, 쾌락적, 상징적 가치를 추구하는 인간상 (예를 들어, 호이징거의 '호모 루덴스') 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는 규범적 관점이다. 또 인간이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불필요한 물건을 왜 구입하려 하는가 라는 현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서는 귀를 기울일 만한 가치가 있다.

루소의 '교육론'은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하는 소양이 무엇인가 라는 철저한 사색을 통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실제로 루소는 교육자로서의 실천에는 완전히 꽝이었다. 복잡한 여자 관계 속에서 사생아를 여럿 낳았는데, 스스로 양육한 아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자손을 버린 스스로에 대한 죄책감에서 명저 「에밀」을 썼다고 보는 관점이 설득력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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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이던 1930년대 서울(당시에는 "경성")에서 대학 초년생 시절을 보낸 외할아버지의 회고록을 보면, 당시 충무로는 일본식 이름인 혼마치(本町)라 했다고 한다. 혼마치에는 <마루젠(丸善)>이라는 책방이 있었는데, 이 책방은 일본어 번역책이 아니라 양서를 취급하는 곳으로 유명하였다고 쓰고 있다.

할아버지가 처음 <마루젠>을 찾은 것은, 마르크스의 독일어 저작을 읽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당시는 공산주의자를 탄압했던 히틀러 정권 시절이었던지라, 독일어 좌익 서적은 거의 수입되지 않았던 것 같다. 결국 할아버지는 지인이 경영하는 고서점에서 <공산당선언>과 <자본론>의 원서를 겨우 구했다고. 그렇다고 해서 <마루젠>이 좌익 서적을 취급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독일어로 된 공산주의 서적은 없어도, 프랑스에서 출간된 서적은 잔뜩 있었다. 할아버지는 <마루젠>에 가득한 프랑스어 책을 읽기 위해프랑스어 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프랑스어로 웬만한 책을 읽을 수 있게 된 뒤 할아버지는 다시 <마루젠>을 찾았다. 독일어 원전을 읽고 할아버지는 공산주의의 "철저한 과학성"에 푹 빠진 열렬한 지지자가 되어 있었다. 할아버지가 이 때 <마루젠>에서 구입한 책은, "공산주의자"인 앙드레 지드가 쓴 <소비에트로부터의 귀환(Retour deL'URSS,1936)>의 프랑스 원전이었다. 문인 고리키의 장례식 참석차 소련을 방문한 지드가 스탈린 정권에 환멸을 느껴 쓴 책인데, 소련에서 일어난 무자비한 정치 숙청의 속내를 고발하고 있었다. 소련을 "지상 천국"으로 동경했던 할아버지에게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얘기였다.

할아버지는 프랑스어 독해력이 부족해서 내용을 잘못 이해한 것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이후 할아버지는 호리구치 다이가쿠(堀口大學)씨의 일본어 번역본 <소비에트 旅行記>을 재차 읽고, 프랑스어 원전에서 읽은 내용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제서야 할아버지는 지드의 고발을 사실로서 믿었고, 실망스러운 허탈감 속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동경심을 접었다고 적었다.

지금의 <마루젠>은 양서로 유명한 책방이 아니라, 다양한 서적, 문방구를 두루두루 취급하는 대형 유통점이다. 도쿄를 포함해 대도시의 중심부에 점포를 여럿 갖고 있다. 우리나라에 빗대자면 <교보문고>와 비슷한데, 1980년에 창업한 우리나라의 <교보문고>보다 역사가 100년 가까이 앞선다. <마루젠>의 창업은 1869년. 서양 문물과 문화를 도입해 적극적으로 소개하는 메이지 시대의 선봉장이었다. 예를 들어, <타자기>를 처음 소개한 것도, 잉크를 넣어 쓰는 서양식 필기구에 <만년필>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마루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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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젠>이 일본에 소개한 서양 문물 중 의외로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이 <하야시라이스>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하이라이스>라고 불리는 바로 그 음식이다. <하야시 라이스(早矢仕ライス)>는 하야시씨가 처음으로 만들었다는 데에서 유래한 명칭이라는데, 바로 이 하야시씨가 <마루젠>을 창업한 하야시 유우테키(早矢仕有的)씨이다. 수입을 업으로 삼았던 하야시씨는 서양 사람들과 친분이 두터웠다. 그는 외국의 요리법을 응용해서, 밥 위에 고기와 야채를 푹 고아 만든 걸죽한 소스를 얹어 덮밥 요리를 고안했다. 하야시씨의 덮밥 메뉴는 유명세를 타서, 시중의 양식당의 메뉴로 등장하게 되었다. <하야시라이스>라는 새로운 메뉴가 탄생한 것이다.

얼마전에 <마루젠>에 다니는 친구로부터 "마루젠의 숨겨진 아이템"이라며, 하야시라이스-카레라이스 통조림 세트를 선물로 받았다. "新厨房楽(우리말로 풀어보면 "새로운 주방의 즐거움"이랄까)”라는 이름이다. 서양문화의 신선함과 일본독자의 전통적 미각이 하나가 된 일본식 양식 문화의 원점이라는 소갯글이다. 메이지 시대에 소개된 <하야시 라이스>와 <카레 라이스>의 맛을 재현했다고 하니 빨리 맛보고 싶다. 100여년 전에 하야시씨가 고안한 그 맛과 같을 수는 없겠지만, 그 계보를 잇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겠다.

할아버지의 <마루젠>은 식민지 시대를 사는 청년의 공산주의 탐닉과 연결되어 있는데, 나의 <마루젠>은 일본과 서양 문화의 만남에 대한 식도락적 호기심으로 종결되었다. 아직 먹지 않았으므로, 맛에 대한 품평은 할 수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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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대이야기(東京大物語、도쿄다이모노가타리)>의 작가 에가와 타츠야(江川達也)의 장편만화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를 읽기 시작했다. 일본 고대 문학의 정수를 만화로 재구성한 '리메이크물'이다.

원전의 문장을 그대로 실은 정도로 충실한 '시대만화'이지만, 심리 에로물의 대가인 에가와 타츠야 답게 야시시한 전개다. '소년만화' 의 전형과도 같은 사랑스럽고 앙증맞은 화필을 타고 1,000년전 사랑이 생생한 에로물로 되살아 난 느낌이다. 슈에이샤(集英社)에서 펴냈는데, 애장판으로 7권까지 시판되고 있다. 1권을 감싸고 있는 안내띠에는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홍보문구가 눈길을 끈다.

- 수험생 여러분! 공부도 술술, 게다가 'H!'
- 사회인 여러분! 교양, 에로스가 일거양득!
- 시니어 여러분! 이 책을 읽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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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으로 접한 <겐지모노가타리>는 <겐지이야기>(전3권, 무라사키 시키부, 전용신 역, 나남출판, 1999) 라는 제목으로 한국어 완역출간된 번역본이다. 고문체 특유의 만연함까지 그대로 옮겨 다소 따분한 번역체의 책이었지만, 등장 인물의 심리 묘사가 생생하며, 당시 모계 중심의 사회상이 엿보여, 독자로서 상상력을 무한히 펼칠 수 있는 독특한 읽을거리였다. <겐지모노가타리>가 문헌으로서 최초 등장한 것은 1001년이라고 하는데, 궁중 문화가 꽃피었던 헤이안 시대(8~12C)의 중반쯤이다. 한반도는 고려 초기, 중국은 송나라 시대다. 작가는 무라사키 시키부(紫式部)라는 이름의 궁녀이다. 이야기 속에도 '와카무라사키(若紫、若는 '어린,젊은'이라는 뜻)'라는 여인이 등장하는데, 혹시? 하는 생각도 해본다.

주인공은 히카리 겐지(光源氏)라는 이름의 황족인데, 스토리는 그와 그의 자손의 연애 행각이다. 3부54첩(편)에 달하는 장편인데, 각 장마다 여인과의 사랑 이야기가 이어진다. 겐지와 사랑을 나눈 여인 중에는 아름다운 여성도 있지만, 못생긴 여성, 나이든 여성, 어린 여성 등 다양하고 다양하다. 모계 사회의 결혼 제도, 당시의 '연애' 코드, 성에 대한 자유분방한 접근 방식 등 1000년 전 인물의 은밀한 삶을 엿보는 것도 재미있지만, 다양한 인물에 대한 개성있는 설정, 생생한 심리 변화에 대한 묘사 등은 문학작품으로서도 빼어나다. 읽다보면, 학창시절 고전시간에 배웠던 "고대소설의 인물은 전형성을 보인다"는 명제를 비웃고 싶어진다.

일본 문학사의 자랑거리답게, 여러 차례 만화로 영화로 또 드라마로 리메이크 된 바 있다. 다른 리메이크작은 본 적이 없어 모르겠으나, 에가와 타츠야의 '에로버전'을 보아도 1000년 전 사랑이야기가 서정적이고도 야하게 넘실거리는 게, 묘하게 '고전적'이고 묘하게 재미있다. 역시 '에로'는 상상력의 근원이다.